지방교회는 한국교회서만 ‘이단’이다

최초에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미국 CRI “우리가 틀렸었다” 고백
CRI 자료 기초해 이단으로 정죄한 한국교회는 ‘미국과 한국은 다르다’며 오리발

서울교회 주일집회 장면

◇서울교회 주일집회 장면 :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본질인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 아래 성경이 말하는 초대교회를 가능한 그대로 재현하는데 있다.

지방교회는 한국교회서만 ‘이단’이다

중국의 복음전도자 워치만 니 계열의 지방교회(The Local Church)는 왜 한국교회에서 이단이 되었는가?

지방교회가 미국으로 건너가 위트니스 리가 로스엔젤레스에 교회를 세운 것은 1962년이다. 그런데 1980년에 미국의 이단연구기관 CRI(대표 월터 마틴)가 “신흥 이단들”(The New Cults)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월터 마틴은 이 책에 갓 미국으로 건너온 지방교회를 이단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 내용을 1982년 현대종교가 “한국교회를 병들게 하는 사탄 ‘워치만 니 계열의 지방교회는 이단인가?”라는 내용으로 번역해 3회에 걸쳐 실었다. 한국에서 지방교회가 이단이라는 근거는 순전히 CRI의 연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료를 기초로 1992년 예장통합측 제77회 총회는 최삼경목사가 제출한 “지방교회 연구보고서”를 받아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결의했다. 그 내용은 △신론의 문제점으로, 위트니스 리가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치고 있고,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기독론의 문제점으로, “예수는 인성이 아들의 명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부활이 필요했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하여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인간론의 문제점으로, 영·혼·육 삼분설을 취하면서 인간의 타락은 육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어 전인적인 타락이 부정된다. △교회론의 문제점으로,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하며 기성교회 목사와 예배 등 대부분의 제도를 부정한다. △따라서 “위트니스 리 사상은 워치만 니 사상과 함께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하는 모태가 되는 명백한 이단이다”라고 했다.

예장통합측 “지방교회 연구보고서”는 연구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비판 내용을 자세히 보면 워치만 니나 위트리스 리가 말한 내용을 거두절미 인용하고 연구자의 자의적 해석에 바탕을 두어 판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자료의 근거를 워치만 니나 위트리스 리의 글에서 따 왔기 때문에 그 간략한 보고서만 보면 그들에게 상당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책을 자세히 보면 전혀 그 내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연구자가 자의적으로 자기 입맛에 맛게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한 예가 최삼경목사가 지방교회측과 벌인 삼위일체 논쟁이다. 그 논쟁 결과 오히려 지방교회를 양태론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을 정통으로 자처하던 최삼경은 자파 교단으로부터 ‘삼신론자’임이 밝혀졌다.

미국 CRI “우리가 틀렸었다”

그런데 30년 전에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했던 미국의 이단 변증기관 CRI(대표 행크 헤네그래프)가 2010년 CRI 저널 신년특집호를 통해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들과 함께 6년 동안 지방교회를 면밀히 재검증 해본 결과 “우리가 틀렸었다(We Were Wrong)”라는 장문의 특집기사를 싣고 지방교회측에 사과했다. 이들은 미국과 중국 등 각 나라에 있는 지방교회를 직접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 면담한 판단에 따라 그같이 평가했다. 그들은 “30년 전의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시인한다”고 밝혔다.

이에 한국 지방교회측은 이 특집호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각계에 돌리고, 미국 CRI가 낸 자료에 기초하여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관련자들(현대종교, 예장통합측 등)에게 바로 잡아 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http://www.localchurch.kr/9625). 그러나 그들은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며 지방교회측의 요청을 거절했다. 과연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가 다른 것인가? 성경이 다른가. 예수가 다른가. 복음이 다른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키 어렵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한국과 미국의 기독교가 다르다면, 둘 중 하나는 이단일 터이다.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미국의 이단연구가와 한국의 이단감별사의 “양심”(良心)일 것이다.

특히 통합측은 재심을 청구한 지방교회의 주장이 장로교헌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기각했다. 그렇다면 통합측은 자신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기독교의 한 일파를 교단의 교세가 많지않다는 이유로 법적근거도 없이 이단으로 규정한 셈이다.

예장통합측이 ‘결자해지’ 해야 한다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보는 교회는 한국교회 외에는 어디에도 없다. 지방교회가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친다거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이라거나, 대부분의 기성교회 제도를 부정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자신들의 지방교회 제도가 보다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뿐 기성교회 성도들을 바벨론 음녀라고 하지는 않는다. 교회의 규칙이나 제도의 설정은 자유권이 있다. 통합측 헌법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통합측 헌법 정치 제1장 원리 제2조 교회의 자유는 “개인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 같이 어떤 교파 또는 어떤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 세례교인 및 직원의 자격, 교회의 정치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통합측은 지방교회뿐 아니라, 스스로가 묶은 여러 이단시비 단체에 대해 객관적 재검증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잘못 묶음이 있음이 발견되면 이를 바로 잡아 결자해지 해야 옳다. 한기총이나 기타 외부단체가 통합측이 무리하게 묶은 단체들에 대해 재검증을 통해 풀 때까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한국교회의 장자교단으로 자처하는 통합측 교단의 자존심 이전에 통합측 교단의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양심의 문제이다.

미국의 일개 이단 변증기관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았을 때 솔직하게 “우리가 틀렸었다”고 고백하고 바로 잡는데, 그것도 공교회가 잘못 묶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단이라고 했다면 과감히 이를 바로 잡는 용기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도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했다. <강>

 

출처 : 교회연합신문 2014-01-16

http://www.ecumenicalpress.co.kr/article.html?no=66668

 

신학토론을 펼치며...

이 코너는 본지에 기고한 김홍기 목사의 글에 대한 지방 교회측의 반론요청을 본지가 수용, 앞으로 5회에 걸쳐 연재됩니다. 김홍기, 김바울 두 필진이 각기 신학적 분석과 주장을 담은 글을 개제하면 이 글에 대한 신앙적 수용과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동일한 대상을 놓고 평판이 있는 진리변증 진영 간에 정반대의 평가를 내린다면, 그 근본 원인들은 과연 무엇일까? 예를 들어 김홍기 목사께서 진술의 기반으로 삼는 '오픈 레터 진영' 혹은 노먼 가이슬러는 여전히 지방 교회들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장장 6년 동안 지방 교회측을 철저히 연구했던 CRI(Christian Research Institute: 대표 행크 해네그레프)는, “누구든지 지방 교회측의 자료들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며 연구하고, …대화하고, … 교회 생활을 관찰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드린다면, 이들이 많은 방면에서 본이 되는 그리스도인 단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우리가 틀렸었다, 29쪽).


그렇다면 이처럼 두 진영 간에 연구결과가 차이가 나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로 연구 동기의 차이이다. 즉 미리부터 어떻게 해서든 "이단처럼 보이거나 언어도단인 것 같은 충격적인 진술들"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떼어 내어 흔들어 보임으로써, "일반인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식"의 이단 연구를 'CRI 저널' 편집장인 엘리옷 밀러는 "가장 나쁜 종류의 이단 사냥"(위의 논문, 26쪽)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논문에서, '오픈 레터 진영'이 바로 이런 식의 '나쁜' 연구를 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CRI는 그런 변칙 플레이를 하지 않았고, 최대한 공정하게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만을 알고자 했다.


둘째는 '오픈 레터 진영'과 달리, CRI는 "비본질적인 문제"와 "본질적인 문제들(핵심 진리)"을 나누어 다뤘다. 그 결과 전자에 대해서는 비록 이견이 있지만, 후자에 있어서 공통 신앙(유3)을 공유할 수 있다면 '정통'이라는 매우 성경적이고 타당한 진리분별 기준을 적용했다.


김 목사께서는 토론 첫 글에서 7개국 복음주의자 70명이 서명했다는 공개서한 내용을 지방 교회측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공개서한의 서명자 대부분이 지방 교회측과 오랜 악연을 가진 모 출판사측과 친분을 가진 사람들이며, 위트니스 리의 글에서 ‘문맥을 무시하고 떼어낸’ 일부 ‘화나게 할 만한 내용’만을 보여주자 서명을 했다. 행크 해네그레프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중에는 내용도 잘 모르고 서명한 사람도 있고, 나중에 그 실상을 알고 서명을 철회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Jerry Johnson).


김 목사께서 인용하여 지적하는 내용들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반박 또는 해명이 된 것들이다. 첫째는 CRI의 연구보고서인 “우리가 틀렸었다”이다. 이 연구 보고서의 구성도 ‘오픈 레터’와 같이 ‘하나님의 본성’, ‘인간의 본성’, ‘복음주의 교회와 교파의 적법성’, ‘법정 소송’으로 되어 있다. 둘째는 지방 교회측이 ‘오픈 레터’에 대해서 답변한 것들이다. 셋째는 지방 교회측이 노먼 가이슬러에 대해서 답변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korean/index.html (한국어, 일부)
http://www.contendingforthefaith.org/open-letter.html (영어)


김 목사께서 여러 말을 했지만, 결국 교파조직을 옹호하는 것이 주된 목적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위트니스 리가 교파에 대해 "바벨론, 영적 음녀..."라고 한 것에 대해 마음이 상하신 것 같고, "교파조직"은 성경적이고, 정당한 것이다 라는 주장을 하고 싶은 것으로 읽힌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반응을 하고자 한다. 우선 비록 위트니스 리는 계시록 17장(큰 바벨론과 음녀)과 마태복음 13장(누룩)을 강해하는 과정에서 다소 '거친 표현'을 했지만, 어찌하든 이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이 생겨났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마5:23-24). 그러나 교회의 순수성이나 단일성에 대한 기준을 낮춰서 '교파주의'를 수용하라는 요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휘오데시아)(엡1:4-5)을 얻으시려는 창세 전부터의 하나님의 갈망이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에 자신들의 온 사역의 역량을 쏟고 있다. 워치만 니(60권 이상)와 위트니스 리(400권 이상)가 저술한 책의 대부분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역사하심' 그리고 그 결과로 산출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적극적인 방면을 다룬다(http://www.ministrybooks.org/ 참조). 그 외에 몸의 머리되신 그리스도(골1:18)를 대치하거나(교황제도 등), "점과 주름과 흠"(엡5:27) 혹은 "나무와 풀과 짚"(고전3:12)에 해당되어 그리스도의 몸(엡1:23)의 본질에 맞지 않는 것들(혼합), 그리고 몸의 하나(엡4:4)의 간증을 약화시키는 분열 등을 경계하고 분별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오픈 레터 서명자들과 김 목사께서는 바로 이 뒷 부분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김 목사님 본인도 '교파'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는 "물론 성침(성서 침례교)은 교파가 아닙니다"라고 했고, "종교개혁은 분열이다"라는 말도 했다. 또한 침례신학대학 출판부가 펴낸 <침례교회>는 174쪽에서 "신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교파나 기구화된 역사적 기독교의 한 분파로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의는 침례교 또한 교파 조직(system)에 대해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성경에 교파를 세운 예가 없다. 바울과 바나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었지만, 그들로 "안디옥 교회 지교회" 혹은 "바울과 바나바 교단"을 세우지 않았다. 대신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처럼 그 지역 안에서 참되게 거듭난 모든 사람들을 교회 구성원들로 하는 '그 지방에 나타난 교회'를 세웠다. 우리는 성경에서 '교파주의'를 지지하는 구절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는 많다(고전1:11-13, 3:3-4, 롬16:17, 갈5:20, 딛3:10). 바울이 작은 분열의 조짐에도 이토록 심각하게 책망했는데, 정식 명칭을 달고 별도의 활동을 하는 각각의 단체들을 향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김 목사의 오해처럼 교파 조직에 속한 동료 믿는 이들 조차 무시하고 조롱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침례교단 혹은 장로교단 안에 있어도 참되게 거듭났으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 지방에 있는 '참된 (지방) 교회'의 일원이다(사람 눈에는 특정교단 소속이지만)(행8:1). 이 문제는 '조직'과 '구성원'을 나누어 보는 시각을 가질 때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교파 조직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나, 그 교파 내의 참된 구성원들은 모두 새 예루살렘으로 건축되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계21:2).


넷째, 유력한 신학자들도 '교파주의'와 '분열'을 반대한다. 합동신학대학원 송인규 교수께서 쓰신 <그리스도의 찢긴 몸>(예영커뮤니케이션, 1995)의 결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너무나 자주 분립했다…걸핏하면 또 하나의 교단이나 교회를 세우며 흡사 상점 운영하듯 교회에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우습게 아는 사단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69쪽).


통합교단 원로였던 고 이종성 박사도 <교회론>(대한기독교출판사, 1995)에서 종교개혁의 산물인 개신교의 출현까지도 "예수의 몸을 찢는 일"이고, "개신교회는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인들" 이라고 말한다(152쪽).


널리 존경받았던 학자이자 <복음주의 협회>(The Evangelical Foundation) 창시자인 도날드 그레이 반하우스 (Donald Grey Barnhouse)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계 17장 5절에 나오는] 이 여자는 창녀들의 어미라 불린다. 어미 창녀가 있고 딸 창녀들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이 우상숭배의 기원이 되는 조직은 많은 하부 조직들을 만들어내며 발전해가고 있다. 종교개혁 시기에 활동하던 개신교 주석가들은 언제나 이 큰 창녀가 로마 교회라고 말했다. 성경은 개신교 단체들을 창녀의 딸들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교파들 안에 참된 증인들을 소유하신다. 그러한 조직 안에 있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이다."(Revelation: An Expository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71, 1982, p 324)


김 목사께서는 미국내 복음주의 진영의 다수가 자신의 입장과 같음을 과시했지만, 그것(교파주의 옹호)은 최소한 위트니스 리의 견해와 흡사한 ‘복음주의 협회 창시자’의 견해와는 다르다.


거듭 밝히지만, 지방 교회측은 비록 교파주의는 배척하지만, 교파(침례교는 물론 심지어 천주교) 안에 있는 동료 믿는 이들을 사랑하며, 결코 “호전적으로 우롱”하지 않는다. 또한 그분들과의 교제를 위해 최대한 열려 있다. 그러나 유기체인 사람과 생명과 거리가 있는 조직은 구분된다. 이런 태도 앞에 CRI와 풀러신학교 측이 오해를 풀고 교제의 악수를 해 왔고,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의 Peter Kuzmic 박사, ‘Evangelical Philosophical Society’(EPS) 회장인 Paul Copan 박사 등 우리의 진심을 이해하는 복음주의 진영의 친구들이 점차적으로 늘어나고 있다(http://an-open-letter.org/Testimonies/ 란 참고). ‘리빙스트림 미니스트리’(LSM)는 오래 전부터 ‘미국 복음주의 출판사 협의회’(ECPA) 투표권 있는 정회원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막힌 담이 헐리고, 쌍방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시고(골3:4), 모퉁이 돌이시며(엡2:20), 우리는 그 한 몸의 지체들임을 보고 기뻐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필자 / 김바울 형제
지방교회 측 진리 변증 위원회 한국어권 담당
Defense & Confirmation Project

김OO


저는 미국 플러턴교회 생활을 하는 한 작은 형제입니다. 한국의 '디시피 코리아'(DCP Korea) 출판사로부터 현재 말씀보존학회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는 <지방교회에 뿌리내린 음녀의 누룩>이란 글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이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1995년 12월호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 제가 그 글을 쓴 김OO 형제(지금은 말씀보존학회를 떠나 진리침례교회를 개척하여 목사가 된)에게 항의 메일을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글을 부탁받으면서 제가 들은 약간의 배경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실 자체가 심각하게 왜곡된 위 글이 인터넷 검색에서 오랫동안 상위를 차지하며 지방교회 측에 대한 거짓된 정보를 유포하고 있기에, 출처를 관리하는 쪽에 글을 삭제할 수 있는지를 문의했고, 담당이신 이OO 이사님으로부터 다음 두 가지 약속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 성경을 근거로 옳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
2. 검토해 보고 타당하다면, 월간지와 싸이트에 올리겠다.


위 문제의 글은 현재 말씀보존학회 홈페이지(지식뱅크-이단연구)에 편집부의 이름으로 올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분은 글을 쓴지 2년 후 쯤인 1997년 5월경 말씀보존학회를 떠났고, 현재는 쌍방간에 친밀한 교류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홈페이지에 따르면 해당 교회는 정동수 님의 '흠정역'을 선호함). 이런 다소 애매한 상황에서 과연 누구를 대상으로 반박 또는 해명 글을 쓰는 것이 합당할지를 잠시 고민해 보았습니다. 글쓴이가 "지방교회에 1년 이상 몸담고 있었으며 3년 이상 위트니스 리의 회복역 신약주석 성경, 라이프 스타디,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비롯한 100여 권의 단행본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그런 사람이 지방교회 측의 "핵심적인 문제점"을 지적한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저의 반박 상대는 말씀보존학회 편집부가 아닌 글을 쓴 장본인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방향 설정에 대해 미리 말씀보존학회 측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합니다.


문제의 글은 제법 긴 서론 외에 네 가지 항목들(최종권위, 성경해석, 교리, 지방입장)을 본론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후 말미에서 "삼일 하나님,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 징계와 보상, 종말론, 성령과 사람의 영" 등에 대해서도 추후 글을 쓸 것처럼 말했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말씀보존학회에 2년 가량 머물다가 다른 곳으로 떠났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에서 1년 가량 생활하다가 떠난 후 부정확한 인식을 토대로 근거없는 비판을 했듯이, 역시 자신의 짧은 경험을 토대로 말씀보존학회 측을 비판하는 위치에 현재 있지는 않는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앞으로 추가 비판이 있을 경우 그 때 재차 다루더라도, 이 글에서는 글쓴이가 다뤘던 1. 최종권위 문제, 2. 성경해석 문제, 3. 교리에 대한 태도 문제, 4. 교회의 지방적인 입장 문제만을 반박 대상으로 하겠습니다.


전반적으로, 김OO 목사님께서 지방교회 측을 비판하신 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실'(fact)을 왜곡한 것에 있습니다. 아울러 '최종권위' 문제는 본인 자신도 나중에 입장을 바꾼 것으로 보이며, 요한복음 14장 2절 '아버지 집(안의 처소)'에 대한 성경 해석은 오히려 비판하는 쪽의 진리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항목 별로 차례로 다뤄 보겠습니다.


1. 최종권위 문제


'최종권위'라는 말 자체가 킹제임스 성경진영 외의 분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인터넷 상에서 이 최종권위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 내용들을 처음부터 지켜보아 왔습니다. 이러한 관찰에 따르면, 킹제임스 진영이 말하는 '최종권위'란 교리 해석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번역 성경 간에 본문 내용에 차이가 있을 때는 <1611년판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최종권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김OO 목사님은 문제의 글을 쓸 당시에는 한글로 처음 번역되었고 유일하게 변개가 안 되었다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 '한국인들'에게는 최종권위이다 라는 입장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미 많이 알려진 것처럼,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송오역) 외에도 권위역(박만수역), 흠정역(정동수역), KJV 완역한글판(서달석역), 공인역(이일배역) 등 킹제임스 한글 성경의 복수화가 이뤄진 이후, 과연 그 중에서 어떤 한글 번역본이 최종권위인가 하는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이 최종권위 문제로 남을 정죄하려면, 최소한 킹제임스 진영 자체 내에서 먼저 이에 대한 통일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이 최종권위 문제로 지방교회 측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김OO 목사님께 질문드리고자 합니다. 김 목사님은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 외에, '한국인에게는 말씀보존학회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만이 변개되지 않은 유일한 최종권위의 성경이다'라는 20년 전의 입장을 지금도 고수하고 계신지요? 만일 어떤 이유로든 지금은 그런 입장을 버렸다면, 김 목사님의 글 중에서 최소한 이 부분 또한 폐기되어야 마땅합니다. 참고로 김OO 목사님이 담임으로 계시는 진리침례교회 홈페이지는 지역교회 안내 란에서 정동수 목사님이 관리하시는 것으로 알려진 "KeepBible을 참조"하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정황은 김 목사님의 최종 권위에 대한 위 글을 쓸 때의 입장이 지금은 바뀐 것은 아닌가 라는 강한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끝으로, 김OO 목사님은 '지방교회' 개념 자체를 크게 오해하고 계십니다(자세한 것은 '지방입장'을 다룰 때 언급할 것임). 부득이 말씀 드리자면, 저는 "지방교회 생활 30년 이상, 수백 권의 관련 책들"을 읽었지만, 지방교회 측이 "성경보다 교회에 더 권위를 두는 경우"를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김OO 목사님께서 지방교회 측과 로마 카톨릭 교회를 억지로 연관지은 후 아래 글에서처럼 이런 저런 비판을 하신 것은 전부 팩트가 없는 거짓말들입니다. 성경은 "거짓된 것을 벗어 버리고, 각자 자기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엡 4:25).


"지방교회는 마태복음 13:33의 여인이 계시록 17장의 음녀이며 이것이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 이 면에서는 모든 개신교회들보다 앞서 있는 셈이다. 문제는 지방교회도 역시 자기들의 "지방교회"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교회로 내세우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교회에 더 권위를 두고, 결국은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하나님께서는 지방교회만을 통해서 진리를 계시 하시고 따라서 지방교회만이 성경의 올바른 해석자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2. 성경해석


위트니스 리는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성경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즉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할 때만 예외적으로(예를 들어 '어린양'(요 1:29))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라고 가르칩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김OO 목사님은 그것을 완전히 '반대로' 왜곡시켜 놓고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실 자체를 왜곡시킨 경우는 성경 근거를 제시할 사안도 못 되고 단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면 족합니다. 그 후의 판단은 건전한 상식을 가진 독자분들에게 맡기면 될 것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책들에서 공공연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며 비유적으로(Allegorically and Spiritually)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밝히고 있다"(김OO).


"제 4장 성경 해석의 원리… 첫 번째 원칙은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감을 주어 성경을 쓰게 하실 때 하나님은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의 언어를 초월하여 영적인 해석으로만 열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이다. 말씀의 글 뜻 그대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원칙을 붙들어야 하고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고수해야 한다… 다만 어떤 환상이나 예언, 비유에 있어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너무 터무니없거나 불합리한 때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위트니스 리,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 한국복음서원, 1991년, 58-61쪽). (성경 해석의 원리 전문 http://www.localchurch.kr/3815)


또한 김 목사님은 문제의 글에서 위트니스 리가 요한복음 14장 2절의 '처소'(place)가 물질적인 새 예루살렘 성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사람의 영'이라고 잘못 영해했고, 3절에서의 '다시 오면'도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뤄졌다'라고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인 해석을 심지어 오리겐 등 알렉산드리아 성경변개자들의 해석방법이라고 함으로 성경변개 문제와도 연관을 지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쟁점은 요한복음 14장 2절의 아버지 집에 있는 '거할 곳'(처소)이 물질적인 장소인가 아니면 영적인 실체인가, 또한 '다시 오심'이 재림인가 아니면 부활 이후 생명주는 영이 되신 주님(고전 15:45)께서 사람 안에 생명으로 내주하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새 예루살렘(계 21:2, 9-10)이 진짜 금으로 된 물질적인 성인지 아니면 생명의 유기체인지 여부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쌍방의 진리해석 상의 이견에 대해, 먼저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 측의 입장을 소개하고, 후에 김OO 목사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식으로 반박해 보겠습니다.


우선 전후 문맥을 볼 때, 요한복음 14장 2절의 '거할 곳'과 '처소'(a place)는 모두 바로 앞의 '나의 아버지 집'과 연결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처소' 혹은 '거할 곳'이 어디인지는 아버지 집이 과연 무엇이며, 어디 있는지를 밝히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될 것입니다. 먼저 2절의 '거할 곳'은 헬라어로 '모네'(3438)인데, 같은 장 23절에서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 것입니다"라는 문맥에서 재차 사용 되었습니다. 또한 20절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이 내 안에 있으며, 내가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내주를 말하는데, 여기서의 그 날은 '부활'의 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14장 문맥 전체에서 볼 때, 아버지의 집 혹은 그 안의 거처나 '처소'는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같은 물질적인 장소가 아닌 영적인 유기체입니다.


성경에서 이처럼 아버지의 집이 '물질적인 장소' 개념에서 영적인 '유기체' 개념으로 전환된 것은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내 아버지 집)을 허십시오.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요 2:19)라고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땅에 있는 물질적인 성전을 생각했지만, 주 예수님은 성전 된 자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기체로서의 성전 즉 아버지 집 개념은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 성도들이 포함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확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 3:16), '하나님의 집이 곧 하나님의 교회이다'(딤전 3:15). '그분 안에서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자람으로써, 주님 안에서 성전이 되고 있다'(엡 2:21)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과 해석은 지극히 성경적이며, 결코 김 목사님 비판처럼 "알렉산드리아의 성경 변개자들" 같은 엉터리 영해가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을 위해 마련되고 있다는 '처소'가 문자적으로 저 하늘 어디쯤에 있을 '물질적인 장소'라는 김 목사님의 주장의 모순을 가장 쉬운 방법으로 지적해 보겠습니다. 김 목사님은 말씀보존학회 출신이시니 주님의 재림이 이미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오시는 지상 재림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유 14, 15, 행 1:11). 또한 재림 후에는 지상에서 천년 왕국이 있게 될 것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으로 짧은 시간에 우주를 창조하신 그분이 수천 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짓고 계신다는 그 물질적인 '처소'의 정체성도 문제지만, 설사 완공된 후에도 성도들은 그 처소를 비워둔 채 예수님과 함께 다시 지상으로 내려 와야 합니다. 또한 그 처소가 진짜 금으로 이뤄진 물질적인 건축물인 새 예루살렘을 가리킨다면, 어린양이신 주 예수님은 금덩어리 신부와 결혼하셔야 하는 모순에 봉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질적인 금이 아니라 정금처럼 변화된 이기는 자 즉 사람이 그 새 예루살렘의 기둥이라고 말씀합니다(계 3:12, 고전 3:12-13). 따라서 이처럼 전혀 다른 쌍방의 성경 해석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바른 성경 해석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겨두고자 합니다.


김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권위로 삼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최종권위로 삼는 헬라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식에 입각해… 성경을 뜯어 고쳤고 그 산물이 바로 오늘날 <킹제임스 성경>(영어의 경우)과 <한글 킹제임스 성경>(한글의 경우)을 제외한 모든 변개된 성서들이다. 따라서 최종권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지 못한 지방교회가 잘못된 성경 해석 방법을 택했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고 하겠다"라고 갈파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의 교회 홈페이지에서는 "덕(virtue)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시행착오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서" 1997년 5월에 진리침례교회를 개척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문제의 글을 쓸 당시에 자신이 몸 담았던 단체를 겨냥한 말처럼 들립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과거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한 셈입니다.


3. 교리에 대한 태도


위트니스 리는 '교리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우리의 신앙을 구성하는 '핵심진리'(유 1:3)는 힘써 싸워 지키되, 침례, 세례 등과 같은 '지엽적인 진리 항목들'에 대해서는 서로를 용납하는 융통성을 가진다는 것입니다('교회 생활의 특수성, 일반성, 실행성' 참조). 이것은 지방교회 측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우리의 생명되신 그리스도(골 3:4)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시고 거처를 확대해 가심으로(엡 3:17) 그분의 몸이요 한 새사람의 완결인 어린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계 21:9-10)(김OO 목사님은 이것을 "지방교회의 최종 목표는 모든 교파가 해체되고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한 지방에 하나의 교회로 단합하는 것이다"라고 왜곡시킴). 즉 저희는 한 몸 안의 지체들끼리 지엽적인 교리를 가지고 끝없이 싸우고 분열되는 것보다는, 모든 일에 겸허하고 온유하며, 또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를 짊어짐으로써 몸의 하나(엡 4:4)와 성령의 하나를 지키는 것(엡 4:3)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방교회 측의 지극히 성경적인 자세를 김 목사님은 엉뚱하게도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태도"라는 식으로 반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를 누룩이라고 부르시면서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것" 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지적하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리'는 '위선'과 '부활과 천사들과 영을 부정하는 것'을 가리킴으로, 베드로가 보았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마 16:16)과 그분의 몸인 교회(18절)를 중심 삼는 지방교회 측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김 목사님 주장처럼 '환란 전 휴거'니 '환란 후 휴거'니 하는 교리 논쟁을 하고, 소위 간격 이론이 관련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어떤 표현을 놓고 신경전을 벌임으로 점점 분열이 고착화되는 킹제임스 진영의 현실이 과연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김 목사님은 문제의 글에서 다른 동료 믿는 이들인 지방교회 측 성도들을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정과 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들"로 함부로 폄하하셨습니다. 그러나 김 목사님의 그러한 교리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본인의 고백처럼 "덕(virtue)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시행착오"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셨으면 합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건축합니다(고전 8:1).


4. 교회의 지방적 입장


적지 않은 분들이 혼동하는 항목이 바로 이 '교회의 지방적인 입장'입니다. 쉽게 말하면 '지방 입장'이란 모든 거듭난 믿는 이들로 이뤄진 주님의 몸인 교회(마 16:18, 엡 4:4)가 시공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 어떤 기준을 범위로 출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가 주장하는 것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라는 말씀처럼 각 교회는 '고린도', '예루살렘'(행 8:1), '안디옥'(행 13:1),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계 1:11)와 같이 '한 도시에 한 개의 교회'로 출현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 도시들이 포함된 도(道) 개념인 '갈라디아'의 경우는 성경은 '갈라디아 교회들'(갈 1:2)처럼 복수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은 거의 대부분 이 원칙을 따라 수신인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방교회 측은 '지방(city) 단위의 각 교회 원칙'을 가장 성경적이라고 믿고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원칙을 따를지 여부는 각자의 신앙 양심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본 빛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 이런 지방 입장이 틀렸다고 하려면 더 성경적인 원칙을 제시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김OO 목사님은 원칙도 일관성도 없는 여러 말로 지방 입장을 비판하셨습니다. 이제 그러한 비판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 뒤에 저의 의견을 달아 보겠습니다.


(김OO) "그러나 문제는 워치만 니 형제가 그리스도의 몸 된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각 지역에 세워지는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혼동했다는 것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 1:2)는 고린도 성읍에 살고 있는 모든 거듭난 사람들, 즉 유기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고린도에 세워진 단 하나의 지역교회(local church)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시 지역교회가 하나밖에 안 세워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개의 지역 교회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 (저의 의견) 위 비판은 근거 없는 '추정'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방에 있는 '유기체로서의 교회'가 곧 그 지방의 '지역 교회'인데, 이 둘을 나누는 것도 성경에 근거가 없고 현재의 분열된 상황을 감안한 타협적인 발상일 뿐입니다.


(김OO) "갈라디아서 1:2의 『갈라디아의 교회들에게 편지하노니』라는 말은 그야말로 지역교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맥에 따라 "교회"라는 단어는 주님의 몸 된, 보이지 않는 유기체로서의 교회(엡 5장), 구약의 불러낸 무리인 이스라엘(행 7장), 이교도들의 성전(행 19:37), 지역교회들(갈 1:2)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문맥을 살펴 확인해야만 한다." --- (저의 의견) 이 말도 역사적 교회들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도(道) 단위 지역 안에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 등과 같은 여러 도시들이 포함되어 있고 이 도시들 안에 구원받은 성도들이 있기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교회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지칭한 것입니다. 이 말이 한 도시 안에 여러 지역교회들이 있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구약의 에클레시아 개념과 신약에서 성령과 연합된 실재를 갖는 신약교회는 구별되어야 하며, 신약의 서신서는 다 그 당시 현존하던 신약 교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김OO) "지방교회는 현재 서울에만 10개가 넘는 집회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서울 교회"라는 이름 하나만 사용하고 집회모임은 따로 갖는다. 함께 모여 주님을 경배하지 않는데도 이름만 하나로 갖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 (저의 의견) 하나의 교회란 꼭 한 곳에 다 모여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많은 가정들에서 따로 모여 떡을 떼었지만(행 2:46) 성령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the Church which was at Jerusalem)라고 단수로 표시했습니다(행 8:1). 왜냐하면 각 교회는 각 도시 단위인데, 그 단위 별로 장로들을 임명하는 것이 사도들이 세운 원칙이기 때문입니다(행 14:23, 딛 1:5 비교 참조).


(김OO) "필자도 한 때는 한국 교회들의 분열을 놓고 마음 아파하다가 이 지방적 입장의 교리가 성경적이고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순수한 생각으로 "천안교회"에 합류하여 생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한글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온전한 성경을 통해서 오늘의 축복된 자리로 인도해 주셨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저의 의견) 그런데 왜 지금은 주님께서 인도하셨다는 그 "축복된 자리"에 계속 계시지 않으십니까?


(김OO) "바울이 자기 민족의 구원에 대해 대단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필자도 한때 함께했던 지방교회 형제 자매들이 진리로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면상 더 자세히 더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짚고 넘어간 것 같다." --- (저의 의견) '계란 껍질'은 병아리가 부화하기 까지 흰자와 노른자를 보호하는 데는 요긴하나, '부화된 병아리'가 출현하면 계란 껍질은 쓸모 없게 됩니다. 김 목사님이 중요시 하신 지방 입장은 계란 껍질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지방교회 측 성도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최고의 인격체이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골 1:27). 그리고 그분의 몸과 그 몸의 완결인 새 예루살렘입니다(엡 4:16, 계 21:2). 김 목사님은 겨우 1년만 생활하시다 보니 '계란 껍질'만 아시고 '부화된 병아리'의 고귀함은 보지 못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김OO 목사님이 비판하신 존 넬슨 다아비는 성공회 사제였지만 하나님께서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심을 보고(계 2:6), 성직자의 지위를 버리고 평범한 형제의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정반대로 한 때는 형제이셨지만 이제는 목사로 불리는 신분을 스스로 취하셨습니다. 만일 지금의 그 목사직이 에베소서 4장 11절의 원문(포이에마)처럼 '목자'로서 성도를 목양하고 가르치는 의미라면 호칭은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담임 목사로서 다른 형제 자매님들이 조금이라도 높이 보는 위치에 계신다면 그것이 바로 목사님이 비판하시는 '음녀의 누룩'일 수 있습니다. 저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의 글에서 혹시라도 필요 이상으로 김 목사님을 폄하한 부분이 있다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합니다. 아울러 대승적 차원에서 이러한 반박 또는 해명의 기회를 허락해 주신 말씀보존학회 측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끝

인터넷의 발달로 다양한 사람들이 이단감별 분야에서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문제는 영적인 것을 다루는 것임으로 신체적인 생명을 다루는 의사 그 이상의 자격과 품성이 요구됩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단감별자가 되려면, 그 자신부터 철저한 검증을 거쳐 성경적인 신앙을 가졌음을 증명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자격 의사에게 수술 칼을 맡긴 셈이 될 것입니다. 이 경우 그가 칼질을 할수록 애매히 고통받거나 무고하게 희생되는 사람들만 늘게 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인규님은 어떤 사람입니까? 다른 단체에 관해서는 나름대로의 연구 실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소위 지방교회 관련 그의 글들은 풀러의  마우 총장의 사례에서 보듯이 상당한 사실 왜곡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주제에서도 그는 “지방교회와 양태론자들은 성부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주장한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교회측은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거짓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거짓말을 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명백한 거짓말이 드러나도 결코 시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또 다른 이슈를 들고 나와 상황을 희석시켜 버립니다. 이인규 님이 이런 유형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태도입니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증명해 보이겠지만, 이인규님의 진리 인식에는 몇가지 치명적인 오류들이 눈에 뜨입니다. 예를 들어 소위 <성부 수난설> 운운 주장 이면에는, 1) 성부만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여호와의 증인식 사상, 2) 삼위는 존재가 분리된 세분이시다 라는 삼신론 사상이 엿보입니다.

 

글이 다소 길어지는 이유로 이번 글인 성부 수난설 반박외에 소위 ‘신인합일론’, ‘단체구원론’, ‘사후천국 부정론’ 등에 관해서는 별도의 반박글로 다루겠습니다.

 


“하나님을 죽이는 성부 수난설”?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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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님은 “하나님을 죽이는 성부 수난설”이라는 제목 아래 이 글 말미에 첨부한 것과 같이 위트니스 리의 원문 글을 여기 저기에서 문맥과 관련없이 떼어다가 장황하게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글 어디에도 거짓 참소의 대상이 된 ‘성부가 성육신했다’ 거나 또는 ‘성부가 직접 십자가에서 수난을 당했다’ 는 언급이 없습니다. 단지 1)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다, 2) 삼위 하나님은 각각 ‘분리된 분들이다’ 라는 이인규님의 비성경적이고 이단적인 잣대가 그런 착각과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하면 ‘성부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라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후 문맥은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하나씩 차례로 이런 오류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인규님의 거짓전제1)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역대로 유대인들은 오직 성부만 하나님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단일신론인 이단사상입니다. 대표적 이단인 여호와의 증인들도 성부 하나님만 여호와 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 두 단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인규님에게도 이러한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글 말미에 소개된 위트니스 리의 언급들은 <그리스도도 하나님이시다> 라는 지극히 성경적인 이해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성경 본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그리스도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롬9:5)


■ “아들에 관해서는 오 하나님, 주님의 보좌는 영원무궁하며…’(히1:8)


■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하자…”(요20:28).

 

그렇다면 유대교와 여호와의 증인의 시각을 가진 이인규님과 지극히 성경적인 관점을 가진 위트니스 리 중 누가 사이비 혹은 이단입니까?

 


- (이인규님의 거짓전제2) ‘지방교회측은 성부 하나님이 성육신하셨고, 성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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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이인규님의 거짓 단정과 달리, 지방교회측 누구도 위와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위트니스 리는 ‘삼위의 두번째’가 성육신 하셨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버리셨다고 성경대로 말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죽이는 성부고난설’ 운운하는 것은 ‘성부만 하나님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라고 믿는 이인규님 본인의 속내만 폭로 당한 것입니다.

 

■ “때가 찼을 때 삼일 하나님은 신성한 삼일성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취한(히 10:5) 성육신으로 보내셨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그리스도, 한국복음서원, 1991, 193 쪽)


■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버리셨는데, 그것은 그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셨기 때문이다(벧전3:18). 즉, 우리의 죄들을 짊어지시고(벧전2:24, 사53:6)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기 때문이다(고후5:21)."(위트니스 리, 신약성경 회복역, 마태복음 27:46 각주 2)

 


- (이인규님의 거짓전제3) ’신격의 삼위는 각각 분리된 셋이시다’?


이인규님과 지방 교회측이 그동안 대립되어 온 핵심쟁점 중 하나는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이 “구별은 되시나 분리되지 않으신 분”이신지(지방교회 측), 아니면 “구별도 되고 분리도 되시는 분”(이인규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인규님처럼 삼위격 간의 분리 가능을 주장하게 되면, 삼위가 구별되나 분리 불가 하시다는 쪽이 틀린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눈이 하나뿐인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눈이 둘인 사람들이 비정상인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일 뿐입니다. 성경 그리고 대다수의 정통 신학자들은 다음에서 보듯이 삼위가 구별되심에서 지나쳐서 분리되신다고 가르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은 나를 믿으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요14:11).


■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마다 아버지 또한 없으며, 아들을 시인하는 사람은 아버지 또한 있습니다"(요일2:23).


■ "삼위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 없다"(헤르만 바빙크, H. Bavinck, G.D. II 2, p 288).

 

이단감별 분야에서 활동하는 모 인사는 “우리 집에 세 사람이 들어왔는데, 한 사람이 들어왔다고 하면 이상하다. 각각 독립된 세 인격체가 들어왔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인규님도 이와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위격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이러한 소위 <세 사람 식 삼일론>은  캅바도키아 교부 등의 정통 신학자들이 배척하는 이단 신론입니다.

 

■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과 비교하는 것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위격으로는 셋이나 실체는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또 하나님의 실체를 아담과 하와와 셋에 비교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역시 잘못된 것이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2001, 241쪽, 원출처: Gregory of Nyssa, QNTD (5:334 ).


■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시지만, 분리되실 수 없으시다. 그분들은 마치 워싱턴, 제퍼슨, 프랭클린이 그런 것처럼, 서로 나란히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다"(Loraine Boettner, 'Studies In Theolog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1947, p109).


■ “신적 실체는 각 사람의 경우처럼 개체적 부분의 한 종류로 간주될 수 없다” (김석환, 삼위일체에서 ‘페리코레시스’ 이론에 관한 분석)

 

참고로 삼위가 각각 분리되신다는 <이인규님식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성육신 하신 아들은 이 땅에, 성부는 저 하늘에 각각 분리되어 계시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성육신하신 아들이 여전히 성부의 품속에 계시고, 또 다른 면에서 이 땅에 계신 그 분이 여전히 하늘에 계신다고 말합니다(요 1:18, 3:13, KJV of man who is in the heaven). 또한 보내신 아버지가 여전히 보냄 받은 아들과 함께 계시고,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안에 계신다고 말합니다(요8:16, 29, 16:32, 14:10-11). 이런 이유로 아들이 있는 자는 아버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요일2:23).

 

한편 ‘삼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으신다’는 정통 삼위일체론에 따르면, 성육신하신 주체는 당연히 아들 하나님이시지만(누구도 성부 자신이 성육신하셨다고 믿지 않음) (갈4:4), 그 아들 안에 구별됨을 잃지 않으면서 분리되지도 않게 상호 내주하시는 성부와 성령 삼위께서 서로 안에 계시게 됩니다. 위트니스 리의 <삼일 하나님> 또는 <온전한 하나님>은 이런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적인 정통 삼위일체론에서는 이인규님의 거짓참소처럼 성부가 성자가 되신다거나 성부만 직접 육신을 입는다 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과 이인규님의 주장은 양립이 불가능하며, 둘 사이에 깊은 간격이 있습니다.

 


(이인규님의 거짓전제4)-‘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단사설이다?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을 엄격하게 분리시키는 이인규님의 눈에는 아들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도 양태론 주장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아들은…영존하시는 아버지요’(사 9:6) 또는 ‘아들을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식의 다소 난해한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런 구절들을 논리적으로 충분히 설명하기란 누구라도 쉽지 않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비록 조직신학적인 어떤 부분이 충돌해도 성경본문 그대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지방교회 측은 이런 구절들을 <경륜적인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위격간의 기능적인 동일시> 또는 <위격 간의 상호내재를 통한 한 하나님>(신6:4, 슥14:9, 말2:10, 갈3:20, 약2:19, 고전 8:6) 시각에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인규 님과 ‘세이연’측은 현재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아래 세 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책임있는 답변과 해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인규님의 거짓 참소를 담은 문제의 글은 즉각 삭제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이 반론글을 함께 게시함으로 독자들이 균형있게 판단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1,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면 잘못된 신앙고백인가?

질문2, 위트니스리 책 중에 ‘성부가 직접 성육신하셨다’라는 곳이 한곳이라도 있는가?

질문3, 위트니스리 책 중에 ‘성부가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라고 한 곳이 한곳이라도 있는가?

 


첨부: 위트니스 리 글 인용부분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삼십삼년반을 사셨을지라도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가서 죽으셔야 했다...그리고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 하심으로 영이 되시어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갖게 했다.(67쪽)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신성한 부분은 그 영이자 하나님 자신이자 거룩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온 존재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 안에 거룩의 영을 갖고 계셨으므로 바로 그 영이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하셨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랑의 합당한 삶. 44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신약의 결론, 그리스도 78쪽)

 

- 첫 번째 영은 생명주는 영이 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 자신이다. 이 영은 최종 완성되신 삼일하나님이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1쪽)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하나님 363쪽)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아들 안에 있으며, 아들이 소유한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 이인규님 글 전문: http://ikccah.org/local_church/2059

 

각주: 위 마지막 두개의 경륜적인 삼위일체관련 인용문들 추후 양태론 반박글에서 상세하게 해명할 것입니다. 사실은 이미 쌍방이 이 문제로 여러차례 공방이 있었기에 해당 반박문은 이미 인터넷상에 올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선 ‘성부 수난설’ 운운한 거짓 정죄만 초점을 두고 해명했음을 밝힙니다.

개혁 신학측과의 대화(2)

- 세대주의 이단 논쟁

 

 

이 글은 먼저 세대주의 혹은 언약 신학을 지지하는 것이 정통 혹은 이단이 되는 문제는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한 형제회와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를 세대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을 밝히고자 합니다. 사실 두 성경 교사는 세대주의가 중요시하는 몇 가지 핵심 항목들에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이들이 생명과 생명의 체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자신들의 사역의 초점으로 삼는 점도 세대주의와 차별화 된 부분입니다.


1. 세대주의 관련 이단 논쟁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1]는 한국의 개혁신학 쪽 분들에게 주로 종말론과 관련해서 이단성 시비가 있어 왔습니다.[2] 그런데 이것은 무천년설만이 유일한 정통 종말론이라는 전제에 기초한 것입니다. 애석하게도 무천년설은 같은 장로교 진영에서도 이견과 비판이 있는 터라, 그와 다르면 곧 이단이 되는 절대 진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3]


한편 언약 신학 쪽에서는 종말론 외에, 세대주의 구원론[4]에 대해서도 비판적입니다. 한 예로 존 걸스트너(John H. Gerstner)는 ‘거듭나야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칼빈의 가르침인데, 세대주의자들은 ‘믿어야 거듭난다’고 정 반대로 말하니 이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요20:31)고 말하는 것은 성경 자체라고 반박합니다.[5] 이외에도 계시록의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문자주의 해석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다른 견해, 시대 구분 등이 세대주의와 관련하여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6] 


그러나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세대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들이 있어 이들을 어떤 고정틀로 뭉뚱그려 비판하기 어렵게 되어 있고[7], 언약 신학 안에도 수정노선이 등장하는가 하면[8], 언약의 정의와 그 성경근거 제시에도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9] 따라서 균형잡힌 신학자들은 언약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을 정통과 이단의 차원이 아니라 보수 신학계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두 가지 다른 틀로 보고 있습니다. 이 점은 항목을 달리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언약 신학의 관계 설정
 

이 연구를 위해 다양한 자료수집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약교회 김성주 목사님이 쓰신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과 장두만 박사님이 쓰신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라는 글이 가장 눈에 띄어 소개하고자 합니다.


“언약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로 인식하며 이를 신앙과 삶의 절대가치와 최고의 규범으로 삼아 믿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두 관점이며 두 교리체계이다. 그러므로이 두 신학의 성경 해석적 관점의 차이는 정통과 이단의 관계로 규정해 비판하기보다는 정통신학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론의 차이로 분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모름지기 신학이란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나 관점을 집대성한 학문적 논리체계로서 인간의 주관적인 사상이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지 않다. 그러므로 특정 신학을 절대화시키거나 신봉하기보다는 반성적 사고를 통해 부단히 연구 정진함으로 신학의 체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심화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선의적인 작업이 부단히 요청된다고 하겠다.”[10]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더 언급해야 될 것은 세대주의와 언약신학과의 관계는 이단 대 정통신학의 관계가 아니라 정통신학 안의 신학적 차이임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보수 신학계에서 상호대립 관계에 있는 두 신학 조류이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 하면서 학문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11]


위 두 분은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신학체계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에 강하게 반대하고, 둘은 상호 보완 관계가 되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특히 장 박사님은 위 논문 서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너무 쉽게 정죄하는 경향”이 있고 “자기의 신학과 다르면 모두 '사탄의 종'이고 '적 그리스도'이고 '거짓 선지자'이고 '이단’”이라고 함부로 정죄한다면서 “필자는 그런 극단적이고 과격한 언사는 양식 있는 학자라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점잖게 충고합니다.


그는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대해 그러한 식으로 매도해 왔다. 그런 논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부 세대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는) 챨스 스윈돌(Charles Swindoll), 존 맥아더(John MacArthur), 워렌 위어스비(Warren Wiersbe), 크리스웰(W.A. Criswell) 등이 모두 이단이거나 사이비이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의 책을 출판하거나 읽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라고 지적합니다.


위 지적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과 일부 같은 것을 말해도 즉각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이단시 하는 경향이 있는 개혁신학 전공자 분들과 일부 이단감별사들이 한번 쯤 귀를 열고 경청해 볼 만 합니다.


3. 세대주의와 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워치만 니는 폐쇄파 형제회와 일정기간 교류가 있다가 성만찬 문제로 교제 단절을 당한 바 있습니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만나기 전 7년 반 동안 형제회 모임에 몸 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경 해석 안에서 소위 ‘세대주의의 특징들’이 일부 발견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세대주의 핵심 특징들에 있어서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과 견해를 크게 달리합니다.


1) 이스라엘, 교회, 왕국 : 전통적인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를 나누면서, 교회는 원래 계획에 없던 것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 연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하와로 예표된 교회는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 목표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신약 교회의 ‘예표’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교회의 실재가 바로 왕국이라고 가르침으로 소위 ‘왕국 연기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12]


2) 대환란 전 휴거 : 알려진 대로 세대주의는 <대환란 전 휴거>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극소수 이기는 자들 외에, 대다수 거듭난 성도들은 <대환란 후 휴거>될 것을 가르칩니다.[13]


3) 7년 대환란 : 세대주의의 <7년 대환란 교리>는 그 내용과 개념이 두 성경교사와 다릅니다.[14]


4) 알레고리 해석 : 비판자들은 워치만 니 특히 위트니스 리가 <알레고리 성경해석>을 한다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문자적 해석이 특징인 세대주의자일 수는 없어야 합니다.[15]


5) 산상수훈 해석 등 : 어떤 세대주의자는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은 유대인들에게 해당되어 신약 교회와 무관하며, 대환란 때 이방인들에게 전해질 ‘천국 복음’(마24:14)을 지금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6] 그러나 두 성경 교사는 마태 복음 5-7장은 왕국 백성인 우리에게 헌법에 해당되고, 천국 복음은 대환란 전에 온 땅에 확산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6) 시대의 구분 : 두 성경 교사는 전형적인 세대주의자들처럼은 아니지만, 시대를 구분합니다.[17] 그러나 대표적인 언약 신학자들인 찰스 핫지와 루이스 벌콥 역시 시대를 구분합니다.[18] 따라서 시대를 구분한 자체가 곧 세대주의자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4. 결론


찰스 C. 라이리는 언약 신학이 체계화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로 극히 최근의 일이고, 초기 교회의 공인된 교리가 아님을 지적합니다.[19] 장두만 박사님은 언약 신학의 행위 언약, 은혜 언약의 석의적(釋義的,exegetic) 근거가 불충분하고, 언약 체결 시기와 언약 당사자에 관해 신학자마다 혼란이 있는 것은 성경 근거가 희박함을 말해준다고 주장합니다.[20] 심지어 믿음이 없는 유아들을 세례주는 근거로 언약 신학이 고안되었다는 혹평도 있습니다.[21] 만일 이런 지적들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면 언약 신학과 다른 것은 이견일뿐 이단일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양 쪽 지지자들 모두가 구 프린스턴 신학교에 광풍처럼 몰아쳤던 자유주의 신학에 맞서 싸웠던 무기였던 <근본주의 5대 강령>[22]을 다시 함께 고백함으써 WCC, 번영신학 등 신종 자유주의가 한국 교계에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함께 영적 싸움을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23] 이런 영적 전쟁에서 자유주의가 적군이라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우군입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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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duranno.com/sl/detail.asp?CTS_ID=2177 (목창균 박사님, 세대주의 논쟁)


[2] 한국교계 내에서는 ‘시한부 종말론’ 비판(ftp://203.230.114.4/DLIIMG/009/009/T0211401.PDF) 또는 선교 단체인 인터콥의 종말론 비판(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602)과 관련하여 세대주의가 자주 거론된다.


[3] 그런데 무천년설만이 정통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 또한 만만치 않다. 1) 차영배 박사님은 그의 <성령론>(도서출판 엠마오, 1997)에서 “대부분의 교부들은 역사적 전천년설자들”이었는데, “이젠.. 무천년설이 득세하여 한국교계의 전천년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탄식하고 있다 (12쪽). 2) 미국의 Faith 신학교를 졸업한 이광복 목사님도 종말론 토론에서 “무천년설은 어거스틴의 알레고리 해석법에 기원하며”, “무천년설에 의존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은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라고 비판한다.<천년왕국, 사실인가 상징인가> (생명의 말씀사, 1996, 201, 203쪽) 3) 특히 덴버 신학교 정성욱 교수님은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267)에서 ‘역사적 전천년설’이 더 성경적인 종말론임을 역설한다.


[4] <세대주의 구원론>과 관련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로 다룰 예정이다.


[5] http://sharperiron.org/forum/thread-dispensationalism-cult (영문)


[6] 이단감별사인 이인규님(감리교 권사)은 <세대주의 비판>이라는 인터넷 상의 글에서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으로 “1) 배타적 폐쇄적이며, 2) 오직 자신들 교리만 진리라고 주장하며, 3)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1)과  2)는 언약신학 쪽도 자유롭지 못하고, 3)의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라는 주장이 세대주의자들의 보편적 특징’이라는 이인규님의 말은 명백한 거짓이다.


[7]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36&wr_id=16 이 자료는 세대주의를 “고전적 세대주의, 수정 세대주의, 점진적 세대주의, 대중적 계시주의”로 분류한다. 이외에도 찰스 C. 라이리는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전도출판사)에서 블링거로 대표되는 ‘극단적 세대주의’를 말하며, 이를 다시 ‘극단적인 유형’과 ‘온건한 유형’으로 분류한다(218쪽).


[8] 포이쓰레스는 <세대주의 이해>(총신대 출판부, 1992)에서 언약 신학의 수정노선과 관련하여, “성경신학”의 등장, 안토니 후크마 종말론의 “지상적”인 영원상태, 그리고 Willem Van Gemeren의 로마서 11장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할” 등을 지적한다(54-55쪽을 보라).


[9] 각주 11이 소개한 논문은 언약 신학자들이 제시한 성경 근거들이 왜 무리한 인용인지를 밝히고 있다.


[10] http://blog.daum.net/7gnak/15718380  (김성주 목사님, 언약신학에서 본 세대주의 신학-특강 자료 중 일부이다)


[11] http://blog.daum.net/lbts5857/4245 (장두만 박사님, 세대주의 신학에서 본 언약신학), 이 논문은 <목회와 신학> 1995년 2월호에도 게재되었다.


[12] 위트니스 리는 <신약의 결론-왕국>(한국복음서원, 1992)에서, “어떤 성경교사들은 왕국이 연기되었다고 잘못 가르쳤다…로마서 14장에 따르면, 왕국은 오늘날의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의 실재가 왕국이다.”라고 말한다(21-22쪽).


[13] 위트니스 리는 계14:4의 ‘첫열매’ 관련 각주에서, 대부분의 믿는이들의 대환란 끝 휴거를 주장한다.http://rv.or.kr/include/flex2/viewer2/recovery_low.php 해당 구절 각주 2를 보라.


[14] 위트니스 리는 계11:2 ‘마흔 두 달’에 대한 각주에서, 다니엘 9장 27절의 “후반부 삼년 반이 대환란의 기간일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7년 대환란>이라는 용어 자체를 부인한다.


[15] 이인규 권사님은 위트니스 리의 ‘알레고리 성경 해석’이 문제라고 자주 주장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성경을 읽을 때 “가능한 한 글자 그대로” 읽되, 필요시 상징적인 의미를 따져 보는 것을 원칙삼으라고 가르친다(한국복음서원이 발간한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을 참조). 이것은 성경을 대하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태도일 뿐, 세대주의자와 무관하다. 성경에는 ‘문자주의’(사7:14)와 ‘알레고리’(갈4:24)가 혼재한다.


[16] http://www.biblemaster.co.kr/bbs/board.php?bo_table=B43&wr_id=25 이송오 목사님은 이 자료에서, “무천년 주의자들은….유대인의 왕국 복음을 이 시대의 구원 계획으로 붙들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17] 위트니스 리는 로마서 5:14 주석에서, ‘아담부터 모세까지’(롬5:14),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요1:17), ‘그리스도 초림부터 만물의 회복까지’(행3:20-21), ‘그리스도 재림부터 천년왕국 끝까지’(계11:15, 20:4, 6)로 시대를 구분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성경 자체의 구분일 뿐 세대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워치만 니에게서도 시대 구분의 흔적을 볼 수 있다(<그리스도인의 50 필수과정, II, 한국 복음서원, 2002, 88쪽 참조).


[18] 찰스 핫지도 ‘different Dispensations’이라는 소제목 아래 ‘아담에서 아브라함’, ‘아브라함에서 모세’, ‘모세에서 그리스도’, ‘그리스도에서 마지막’으로 시대들을 구분한다(Systematic Theology II,  pp. 373-377). 핫지와 벌콥의 시대구분은 찰스 라이리의 <세대주의의 바른 이해> (전도출판사) 48-49, 54쪽도 보라.


[19] 언약 신학의 상세한 역사는 위 라이리 박사님의 책 200-205쪽을 참조하라. 혹자는 어거스틴의 "구약은 숨겨진 신약이다. 신약은 드러난 구약이다."라는 말을 빌려 언약 신학 기원을 초대 교회까지 소급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대주의 쪽도 역시 어거스틴의“시대를 구분하여라. 그러면 성경은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룬다”는 말을 세대주의 기본원칙 중 하나로 인용한다(위 각주 16의 제공자료 참조).


[20] http://blog.daum.net/lbts5857/4245 


[21] 박만수 형제님은 “칼빈은 유아들이 믿음의 선택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예정과 주권섭리에 의해 그들이 이미 은혜 계약 안에 있다고 판단되면 얼마든지 세례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고, 그것이 소위 언약 신학의 출발점이었다”라고 주장한다(http://blog.naver.com/hjxch/80036289026).
 

[22] 근본주의 5대 강령은 ‘성경의 무오성,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 육신입은 부활, 기적의 인정(또는 재림 신앙)’이다.


[23] http://blog.koreadaily.com/korea3927/695125 김명도 박사님은 이 글에서 “개혁주의와 신근본주의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바른 믿음을 지키려는 교단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24] 중국 난징소재 ‘진링(金陵)연합신학대학’의 왕애명 박사님은 최근에 10년(2002- 2012년) 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 및 지방 교회들을 연구한 결과, 이들이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고백하는 개신교 표준 고백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공개 증언한 바 있다(http://www.localchurch.kr/localchurchnews/7957). 이것은 미국 ‘크리스천 리서치 인스티튜트’(CRI)와 풀러 신학교 측이 장기간 연구한 결과와 일치된 결론이다.